
한줄평
아들러에서 시작하여 니체로 끝나는 기묘한 이야기
책 정보
알프레드 아들러 저/홍혜경 역, 을유문화사, 2016년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좋은 사람도 만나지만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때문에 삶이 더욱 힘들어진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저사람은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왜 저런 행동과 말을 할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우린 언제나 그렇듯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 결과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피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인간들을 이해하며 살아야 할까?
오늘 소개할 책 ‘아들러의 인간 이해’에는 우리가 왜 인간이해를 하며 살아야 할 지 이야기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커질수록 공동생활의 방해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더 화합하며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 16-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것은 중요하다. 약 20만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이루며 외부의 위협은 피하고, 공동체가 서로 돌보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이였다. 이 과정에서는 좋든 싫든 타인에 대한 이해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 부터가 어려워 보인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주요 연령집단별 1인가구 비율 중 20-30대 1인 가구 통계를 확인해보면, 2000년에는 6.5%에서 2022년에는 12.3%로 급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공동체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살고있다.
더 나아가 가족과 학교와 같은 공동체 마저 와해되고 파편화 된다. 거기엔 우리의 권력 의지와 허영심이 깔려있다. 아들러는 권력 의지와 허영심이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열등감은 삶을 진취적으로 극복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피투로 태어났지만 기투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모두가 열등감을 극복할 순 없다. 극복되지 않은 열등감은 인간의 마음속에 굴절된 욕망을 심어준다. 바로 권력에 대한 욕망과 허영심이다. 이런 권력 욕망과 허영심은 인간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허영쟁이들은 보통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지 않으려 하며 남에게 그것을 전가한다. 자기들은 항상 옳고 남들은 항상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p. 236-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우린 극복해나가야 하는가. 인간이해를 통해 공동체를 회복하고 우리 모두 행복한 길로 갈 수 있을까?
‘가장 훌륭한 인간 이해자는 아마도 모든 열정을 스스로 겪어낸 사람일 것이다.’ -p. 28-
위 글을 보면 모든 열정을 겪어낸 사람은 마치 니체가 말했던 초인(위버멘쉬)를 연상케 한다. 개개인의 위버멘쉬들이 주변인의 열등감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여 공동체의 회복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발전을 통해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최근 베스트 셀러 중 하나로 송길영 저자의 ‘핵개인의 시대’라는 책이 있다. 앞으로는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하고 한명의 인간으로 자립하는 시대를 예견하는 내용이다. 이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람이 위버멘쉬가 될 순 없지만 어려움을 겪어낸 선구자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후발자에게 인간적 이해와 열등감이 왜곡되지 않게는 해줄수 있다.
아들러는 ‘가족보다 더 올바르게 아이의 성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도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가족의 양육태도는 아이는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현명할 수 없고 가족의 양육태도도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도가 그 모든 역할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학교는 개인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며, 학생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학교 교육이란 건 많은 도움을 주지. 학교 교육이라는 건, 어느 정도까지 받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지’라는 주인공과 선생님의 대화가 나온다. 학교에서 우리는 자기 이해를 통한 자기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다른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도 마음 아픈일이지만, 특히 학교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모습은 미래가 더욱 절망스러울 것이라는 한편의 예고편 같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입시가 결정된 중3과 고3의 교실은 개탄스럽다. 학생들은 학교에 오지 않는다. 왜 안오냐고 물으면 더이상 학교에서의 출결은 입시와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교사, 친구, 학교는 오직 다음 단계를 위한 쓸모로써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 다음 단계가 결정된 이후에는 학교 공동체는 어떤 의미도 어떤 존재도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교사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 미래의 작은 희망이 될지도 모를 깜부기 불을 살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