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줄평
시대의 아픔이 슬픔이 되지 않게
책 정보
한강 저/ 창비/ 2014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소년이 온다’의 인용된 부분을 읽을 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윤석열의 탄핵투표가 진행되던 국회 앞에서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1차
국회의사당 앞
그날의 나는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했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였다.
아마 1980년 5월 18일 화창하고 따뜻했던 광주에서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던 울분을 ‘소년이 온다’에서 느낄 수 있다.
소설에서는 총 6개의 장과 하나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있다. 소설 속에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사람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눠볼 수 있다. 희생된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사건 당시의 계엄군의 무자비함과 동시에 희생된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강 작가는 전두환의 대한 분노와 계엄군의 증오보다는 광주에 있던 사람들에게 조금 더 귀기울이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그래서 정미 누나와 친남매가 맞나 싶게 못생긴 정대. 단춧구멍 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중략) 소풍날 장기자랑에선 복어같이 뺨을 부풀리며 디스코를 춰서, 무서운 담임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정대.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p.35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특별하거나 모난 곳이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소박하고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어준다. 상무관으로 온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죽은 가족을 품에 안고 슬퍼하는 유가족, 행방불명된 손녀를 찾아 온 어르신의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글이 눈앞에서 영상으로 떠오른다. 섬세한 묘사는 글의 몰입감을 더욱 높여준다.
민주화 운동 이후로 살아남은 사람은 나름대로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p.135
살아남은 사람은 인간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원래 잔인한 존재인지, 부당한 지시에 이렇게도 취약한지 의심하다 보면 남은 일생은 행복하게 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 결과 소설 속 진수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슬픔을 잊기 위해 술로 하루를 버티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삶으로 버티고 있다. 1980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시대의 아픔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퍼뜨리고 있다. 아픔이 슬픔으로 자라나지 않게 죄 있는 사람에게 마땅한 처벌과 슬픈 역사에 대해 조롱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는 엄벌을 가해야한다.

옛 전남도청은 현재 1980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복원 뒤에는 어떻게 운영할지 기대가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다행히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강연문 중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말을 했었다. 2024년 12월 또 한 명의 독재 꿈나무가 계엄을 했었지만, 과거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명백히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자가 산 자를 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 빚을 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과거를 마주할 것인지는 명백하다.